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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⒆] 돈과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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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의 모든 제의종교에서는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역사적으로 희생제물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변했는데, 여러 설화에 따르면 처음에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우상 몰렉에게는 인간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는데, 식인관습이나 여러 민족들의 설화는 이런 사정을 보여줍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을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했고, 자식을 몰렉에게 제물로 주는 사람은 반드시 돌로 쳐죽이는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레 18,21; 20,2-5; 왕하 23,10; 렘 32.35 등).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도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전통과의 결정적인 결별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전환은 인류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들어가면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희생 제물로는 사냥한 야생동물이나 가축이 선택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여러 제의에서 바쳐진 동물은 주로 닭, 돼지, 소 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소, 양, 비둘기 등이 바쳐졌지요(요 2,14).


    < 2 >


    그렇다면 언제부터 희생동물이 돈으로 변해 헌금의 형태가 되었을까요? 정확한 전환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예수님 시대, 성전에서 제물을 사는 돈과 시장에서 통용되던 돈이 달랐고, 성전통화로 환전하여 제물을 사서 바쳤다는 것을 보면(마 21,12; 막 11,15), 당시에도 돈을 직접적인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제물을 대체하게 된 것은 유대전쟁 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 없는 백성이 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회당과 율법 중심으로 전환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봅니다. 아무튼 지금은 헌금을 희생제물과 동일시할 수 없지만, 헌금이 제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3 >


    그렇다면 헌금은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떻게 드리는 것이 신앙에 맞는 헌금정신일까요? 고신대 외래교수이자 다우리교회 담임목사인 임경근 목사는(2014년의 글), 유난히 한국교회에는 헌금 종류도 많은데, 무려 71개나 된다고 합니다. 헌금이 부담스러워 교회를 떠나는 신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산물이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헌금은 신앙인에게 부담이거나 걸림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헌금정신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제사 혹은 예배 형태건, 희생제물 혹은 돈이건, 몸으로 드리는 헌신이건, 봉사건, 기도건, 모든 봉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보다는 ‘봉헌’(奉獻)(offering), 곧, ‘받들어 바친다.’,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이라는 뜻의 봉헌이라는 단어가 한결 폭넓은 개념이고, 돈으로만이 아니라 성미, 봉사, 기도 등으로도 바치는 행동을 포괄한다고 하겠습니다.


    < 4 >


    그러면 봉헌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에 의하면 봉헌은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또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출 25,1-2),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신 18,1-5),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신 14,28-29; 15,11) 봉헌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초대교회들은 예배 장소와 시설 유지를 위해, 교역자의 생활비를 위해, 그리고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주고(고후 9,12), 심지어는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구제했습니다(고후 8,2-3).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봉헌했습니다(빌 1,5; 4,15).


    신약에 나오는 봉헌의 액수는 일관된 규칙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몫을 정하여, 유대에 사는 신도들에게 구제금을 보냈고’(행 11,29), 고린도 교인들은 ‘매주 첫 날에,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했다가, 헌금을 했다’(고전 16,2)고 합니다. 봉헌자의 수입에 따라 정한 것이지요. 많이 번 사람은 많이 하고, 적게 번 사람은 적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바치는 것이지’(고후 8,12),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후 9,7)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시기’(고후 8,12; 9,7) 때문입니다.


    물론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양과 액수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의미합니다. 이런 십일조 개념은 모세의 율법에 제시된 십일조 개념과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은 수입의 십일조만이 아니라, 물건을 살 때에도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따른 십일조와 같은 원리로 십일조를 계산한다면, 수입의 23%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십일조는 일종의 조세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일조를 문자적으로, 또 율법적으로 오늘의 한국교회에 적응하는 것은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액수와 관계없이 봉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면, 십일조 자체가 문제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최대치로 생각하든 최소치로 생각하든 중요한 것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 5 >


    봉헌의 자세는 첫째, ‘인색함’으로나 ‘억지’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고후 9,7).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고후 8,12)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구제를 위한 봉헌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마케도니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이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고, 힘이 닿는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으며,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였다’고 합니다.(고후 8,1-4). 그렇습니다. 구제를 위해 봉헌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기에 힘에 지나도록 해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봉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고후 9,6). 주님은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이니, 여러분은 모든 일에 부요하게 되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고후 9,10-11)고 합니다. 씨를 마련해 주시고, 여러 갑절로 늘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거둔 대로 바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넷째, 봉헌은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행 5,4). 사도행전에 전승되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판 땅 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놓았다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불행한 예입니다. 얼마를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헌금을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지요.


    다섯째, 봉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흥정하듯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봉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헌금으로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말라기서 3장에서 하나님은 십일조 바치는 일로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말 3,10)


    십일조는 구약성경 전통이기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물론 구약 시대 일종의 조세 성격을 가진 헌금이었습니다. 국가교회 체제를 유지하는 독일교회에서는 소득세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종교세를 내고, 개별적으로도 자기 교회에 주일헌금, 구제헌금 등을 별도로 합니다. 그러나 국가종교가 아닌 한국교회에서, 게다가 여러 가지 조세를 내고 있는 현실에서 십일조는 과하고,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감사로 드리지 않는 헌금은 그것이 십일조든 아니면 백일조든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말씀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헌금으로 생활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독일교회 신도들이 바치는 식사기도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주님께서 주신 것,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도는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바치면서 한 다윗의 기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입니다.’(역대지상 29,14).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는 신자에게 십일조는 최대 기준이 아니라, 최소 기준일 것이고, 봉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여섯째, 그러므로 헌금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렙돈 두 닢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신 예수님은 결국 마음을 더 중히 여기신 것이지요(눅 21,1-4).


    그래서 바울도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고후 8,12)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50편을 쓴 시인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고,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주님은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신다.’(시편 50,23)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하면서,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저자와 함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잠 30,7-9)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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