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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⒁] 간음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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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간음’(라틴어로 porneia)은 비혼인관계에 있는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는 행위라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간통’(adultery)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간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간음 금지 명령은 ‘간통하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간음을 ‘adultery’로 번역했고, 독일어 성경도 ‘ehebrechen’으로 번역한 것 같습니다.


    일부다체제가 원칙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도 허용된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노예들이나 매춘부들과의 성관계가 남자들에게 허락된 사회에서 간음금지명령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적용된 명령이었습니다. 남성들의 간음죄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반면, 여성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던 것이지요. 당시 남편들은 간음을 범한 자기 아내를 죽일 권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들에게 간음죄가 혹독하게 적용된 것은 남편의 혈통의 진정성이 중시되었고,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간음은 재산권을 침해하는 범죄였기 때문이었고, 핏줄이 의심되는 후손에 의해 가족의 안전이 침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간음은 고대 사회에서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죄가 아니라, 이웃과 그 가족 전체의 삶을 파괴하는 사회적 범죄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간음죄를 저지른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습니다. 레위기는,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곧 자기의 이웃집 아내와 간통하면,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레 20,10)고 규정했고, 신명기법전도 ‘어떤 남자가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들켰을 때에는, 정을 통한 남자와 여자를 다 죽여서, 이스라엘에서 이런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신 22,22)고 합니다.


    그러나 약혼한 여자를 들에서 강제로 욕보인 경우에는 남자만 처형하고 여자에게는 아무 벌도 주지않음으로써, 여자를 보호했고(신 22,25),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욕을 보였을 경우,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세겔을 지불해야 하고,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신 22,28-29).


    간음죄가 극형으로 다스려지고, 엄격하게 법적으로 규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계명에 명시된 것은 율법과 극단적인 처벌도 간음을 막지 못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고대 유대 사회만 그랬겠습니까! 시대마다, 나라마다 간음에 대한 이해와 법적 규제가 달랐지만, 간음 문제는 오늘까지 문제되고 있습니다.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자인 칼뱅은 간음을 ‘모든 부정한 성 행위’라는 의미로 확대해석했습니다. ‘간음하지 못한다’는 계명은 혼인의 서약을 깨는 행위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넘어, ‘모든 음란한 행위들과 이를 꾀하려는 모든 사악한 생각들까지도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이런 논리로 칼뱅은 심지어 음란한 의상, 난잡한 언어, 춤, 음주까지도 하나님 징벌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칼뱅의 지나치게 엄격한 이런 해석은 후에 청교도들에 의해 새로운 율법주의로 탈바꿈되어 인간을 억압하는 단초가 되었고, 19세기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 보수신앙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을 극단적으로 죄악시하거나, 극단적으로 신성시하는 분열된 성의식이 그것이지요. 한편으로는 혼전 성관계, 높은 이혼률, 가정폭력을 속수무책 바라보기만 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혼전순결선언 등 도덕재무장운동을 강화하는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자 선물로 기뻐하면서도, 성이 억압과 범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 2 > 


    역사적으로 간통죄는 아내가 낳은 자녀가 남편의 핏줄이라는 부계혈통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재산으로 여겨진 여자를 지키기 위한 법이었기에, 간통한 남자와 여자 모두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간통죄는 20세기 중후반부터 점차 폐지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도 2015년 2월 26일, ‘형법 241조(간통)는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하여, 2016년 1월 6일 형법에서 삭제하였습니다. 이른바 간통죄가 폐지되어 얼마나 더 많은 간통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한 이혼률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처벌법이 있다고 해서 간음이 없어지지 않은 역사에 비추어보면, 간음은 개인적, 사회적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본성에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을 사로잡아 억압하고 있는 성적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계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탐욕은 그 어떤 욕망보다 강력한 욕망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욕구(needs)와 욕망(wants)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면 갈증, 식욕, 성욕 등은 객관적, 생리적 욕구로서 이것의 충족은 만족이지만, 욕망의 충족은 불합리한 쾌락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적 탐욕같은 불합리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은 육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프롬은 보았습니다. 즉 탐욕은 불안이나 억압을 해소시키고자 하는 정신적 공복에서 오기에 결코 만족될 수 있는 욕망이 아니다는 것이지요.


    탐욕이 육체적 결핍이 아니라, 정신적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는 프롬의 분석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간음하지 말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7-28).


    그렇다면 만족될 수 없는 이런 성적 탐욕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욕망의 흐름을 하나님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정결케 하는 데 길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존재물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에서 존재에 대한 사랑인 ‘카리타스’로 바꾸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고결한 사랑이자 인간의 존재에 자체에 대한 정결한 사랑만이 꺼지지 않은 불길같은 성적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요,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길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넘어질지 모릅니다. 탐욕의 극복은 쉽지 않지만,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 3 >


    ‘간음하지 못한다’는 계명은 탐욕의 극복이라는 개인적 과제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과연 ‘결혼’이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합니다.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고,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이혼의 사유도 다양해지고, 이혼율도 급증하는 시대에, 결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하나님이 간음 금지명령을 십계명에 포함시킴으로써 결혼 생활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 지를 주목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모든 제도 가운데 결혼을 으뜸으로 세우시고, 남자와 여자를 달리 지으시되 성적 방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진실하게 대하고, 생육하고, 자손을 낳으며, 그들을 양육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음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을 모든 제도 가운데 으뜸으로 생각한 16세기 유럽의 마틴 루터의 상황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결혼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간음 금지명령’이 결혼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 특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한 때, 이혼 사유 가운데 하나는 배우자의 외도였습니다. 지금은 ‘성격차이’가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경제문제, 가족 간의 불화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혼인서약은 ‘사랑합니까?’라고 묻지 않고, ‘사랑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결혼의 동기가 아니라, 결혼과 함께 앞으로 맺게 될 열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은 사랑하겠다는 약속이고, 감정이 아니라 헌신이라는 것이지요. 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지만, 동시에 증인들 앞에서 서약과 함께 일어나는 것은 결혼이 사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하지 못한다’는 계명은 결혼한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결혼을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간음할 수 없는 것이지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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