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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25] 무르익은 반란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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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왕국 예후(주전 842-836년)



    ‘예후’는 북왕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인물이면서, 동시에 남왕국 ‘아하시야’까지도 죽인, 남북왕국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만든 인물입니다. 또 우리가 이미 살펴본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에 이르기까지 ‘예후’ 왕조는 약 100년간 북왕국을 다스립니다. 이는 직전 왕조인, ‘오므리’ 왕조 전체 통치 기간의 두 배에 달합니다.


    하지만 「열왕기」에서 ‘예후’의 치적을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열왕기하 9-10장」은 오직 ‘예후’의 반란이 일어난 상황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후’의 통치 기간에 관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10장 32-36절」이 전부인데, 그 내용도 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는 이야기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열왕기하 10장」의 내용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특수한 자료로 보이기 때문에 북왕국 ‘아합’을 다룰 때나 그 이후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후’ 반란 이야기, 「열왕기하 9-10장」에서 ‘예후’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좋은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이런 「열왕기」의 평가는 예언자 ‘호세아’의 평가와 다릅니다(호1:4 참고). 또 예언자 ‘아모스’가 ‘예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지만, ‘아모스’ 역시 ‘예후’ 왕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㉑ 「역사가와 예언자의 차이」’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역대기 역사가 집단은 본래 북왕국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예후’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후’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를 그려놓은 「열왕기」가 ‘예후’의 치적에 관해 침묵하는 부분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합니다.


    다만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열왕기하 10장 28-31절」에 ‘예후’에 대한 부연 설명을 달아놓음으로 자신들이 ‘예후’의 치적에 관심이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후’는 여전히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겼으며, 전심으로 야훼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침묵으로 인해 우리는 ‘예후’의 통치 기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열왕기하 9-10장」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예후’의 반란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는 있습니다. 따라서 ‘예후’가 일으킨 반란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후 반란과 주변국 상황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주전 858-824년)’는 몇 차례에 걸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침공합니다. 그의 초기 원정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네 번째 원정(주전 845년)과 다섯 번째 원정(주전 841년)을 통해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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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바일 조각상 ⓒ위키미디아


    위의 사진은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쿠르바일 조각상(Kurba’il Statue)입니다. 여기에는 ‘살만에셀 3세’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 기록이 나타나는데, 아람왕 ‘하사엘’과의 전투 기록 아래에 ‘예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그때 나는 두로, 시돈, 오므리의 아들 예후에게 조공을 받았다(ANET 280).”라는 기록이 적혀있습니다. 이 내용은 님루드에서 발견된 검은 오벨리스크(Black Obelisk)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루켄빌(Daniel D. Luckenbill)’에 의해 편집된 「Ancient Records of Assyria and Babylonia」(이후 ARAB) 590행에 번역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밀러/헤이스’ 『고대 이스라엘 역사』 351페이지를 따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야우아(예후)의 조공, 은, 금, 황금 대접, 황금 잔, 받침 있는 황금 술잔들, 황금 물주전자들, 납, 왕의 손에 쥘 홀들, 창들을 나는 그로부터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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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오벨리스크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검은 오벨리스크의 일부인데, 부조 속에 엎드려 있는 인물이 북왕국 ‘예후’입니다. 이 부조에 따르면 ‘예후’ 통치 이후 북왕국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쿠르바일 조각상과 검은 오벨리스크에 기록된 시기는 ‘살만에셀 3세’의 다섯 번째 원정이 있었던 주전 841년으로 봅니다. 주전 845년에 있었던 ‘살만에셀 3세’의 네 번째 침공은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반아시리아 연합이 상당히 성공적으로 막아냈기 때문입니다.


    즉 ‘예후’의 반란은 주전 845년 이후, 841년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열왕기하 10장 36절」에 ‘예후’가 북왕국을 28년간 다스렸다는 기록과 후대 왕들의 연대를 맞춰서 도출되는 주전 843년에 ‘예후’의 반란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시리아의 침공이 있기 바로 직전인 주전 842년에 반란이 일어났을 것으로 봅니다. 주전 845년 ‘살만에셀 3세’의 네 번째 침공 때에 아람의 왕은 ‘하닷에셀’이었습니다. 「열왕기하 8장 7-15절」에 나타난 ‘하사엘’의 반역은 분명 주전 845년 이후인 844-843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만약 「열왕기하 9장 15절」에 나타난 북왕국 ‘여호람(요람)’과 아람 ‘하사엘’의 전쟁이 사실이라면, 이 전쟁은 ‘하사엘’이 아람에서 왕이 된 이후 이루어진 전쟁일 것이며, 주전 843-842년에 벌어진 전쟁일 것입니다. 특히 북왕국이 아람을 침공하기 위해 길르앗 라못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면(왕하9:1-19 참고), 북왕국 ‘여호람’과 아람 ‘하사엘’의 대립이 짧은 시간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저는 ‘예후’의 반란이 주전 842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시리아의 침공과 함께 살펴볼 것은 ‘아합’ 때에 북왕국의 속국이었던 모압의 반란입니다. 「열왕기하 1장 1절」은 ‘아합’이 죽은 후 모압이 배반하였다는 진술로 시작됩니다. 이는 「열왕기하 3장」에서 북왕국과 모압의 전쟁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할 사료가 현재의 요르단 디반(Dhiban, Jordan)에서 발견되었는데, 메사 비문(Mesha Stele) 또는 모압 석비(Moabite Stone)로 불리는 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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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서 비문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이 메사 비문입니다. 북왕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왕이자, 이 비문을 기록했다고 적혀있는 모압 왕 ‘메사’의 이름을 따서 메사 비문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Louvre)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적힌 내용 일부만 살펴보겠습니다. 번역은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224페이지를 따릅니다.


    “오므리(Omri)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모압을 압제하였는데... 그러나 나는 그와 그의 집을 제압했고,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었다... 오므리는 메데바(Medeba)의 전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오므리는 그의 통치기 전체를 살았고, 그의 아들은 그의 시대 절반 동안 살았다. 모두 40년이었다.”


    메사 비문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아합’이 그의 아버지 ‘오므리’에 비해 절반의 통치 기간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합’은 22년을 다스렸고, ‘오므리’는 8년을 다스렸습니다.


    또 모압이 ‘아합’의 죽음 이후 북왕국을 배반했다면, 그 기간은 4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또 모압이 북왕국을 제압하여 폐허로 만들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메사 비문은 북왕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후 모압 왕 ‘메사’가 조금은 과장되게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조금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열왕기」의 기록과 함께 모압이 북왕국 속국에서 벗어났으며, 「열왕기하 3장」과 동일한 전쟁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열왕기하 3장 27절」의 기록대로 북왕국 ‘여호람’이 모압의 반란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후 반란의 당위성


    학자들은 ‘예후’가 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는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합니다. 먼저 「열왕기하 9-10장」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세벨이 예언자를 박해했기 때문’과 ‘나못의 피’ 때문입니다.


    나중에 「열왕기상 17장-열왕기하 10장」에 관해 살펴볼 때 더 자세하게 생각하게 되겠지만, ‘아합’과 ‘이세벨’에 의한 야웨 예언자 박해는 바알 제사장 집단과 야웨 예언자 집단간의 갈등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로 보입니다. ‘이세벨’이 그저 악하고 우상 숭배를 즐겨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야웨 예언자들이 박해받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아합’ 왕실이 추진했던 어떤 정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합’이 그저 그 땅이 탐나서 빼앗았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아합’은 「열왕기」에 나타난 모습 이상으로 강성한 북왕국을 일으킨 왕입니다.


    그래도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사건은 ‘아합’이 무고한 피를 흘려 땅을 빼앗은 사건이 아니라 지주의 땅을 왕실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아합’ 이후 ‘오므리’ 왕조는 종교적으로는 야웨 예언자 집단에게 미움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지주 계층의 미움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두 집단이 ‘예후’의 반란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므리’ 왕조는 ‘여호람’ 통치 이후 군사 집단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열왕기하 9장 5-13절」에 나타난 군대 장관들은 ‘예후’의 반란을 지지합니다. 「열왕기하 9장 12-13절」에는 마치 ‘솔로몬’의 대관식(왕상1:39-40)이나 ‘요아스’의 대관식(왕하11:11-12)을 연상시키는 대관식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들식의 공통점은 대적자가 있는 상황에서 급하게 대관식을 거행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군대 장관들이 ‘여호람’을 배신하고 ‘예후’를 선택한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모압의 배반입니다. 북왕국 ‘여호람’은 모압을 제압하지 못했고, 자신의 아버지 ‘아합’ 때까지 속국이었던 모압의 독립을 허용합니다. 군대 장관들은 ‘여호람’의 군사 지휘에 불만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9장」에서 ‘예후’와 군대 장관들은 길르앗 라못에 파병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람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 정책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9장 22절」에서 ‘여호람’은 ‘예후’를 향해 “평안하냐?”고 질문하는데, 이는 ‘존 그레이(John Gray)’가 해석한 대로 “(길르앗 라못에서의 일은) 잘 되어가냐?”로 읽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존 그레이, 『열왕기하』, 국제성서주석 10, 143).


    개인적으로 상당히 고민스러웠던 부분이 북왕국 ‘여호람’과 아람 ‘하사엘’의 전쟁입니다. 분명 주전 845년 ‘살만에셀 3세’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북왕국과 아람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연합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반아시리아 연합군은 여러 번 ‘살만에셀 3세’의 군세를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이들이 ‘살만에셀 3세’의 네 번째 원정 이후 갑작스럽게 동맹을 깨뜨리고 서로 전쟁을 벌여 아시리아에게 침략 기회를 주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비’는 쿠르크 석비(Kurkh Monolith)에 나타난 ‘살만에셀 3세’가 점령하여 조공을 받은 12개국 동맹의 명단에 두로와 시돈, 사마리아가 빠져 있음을 근거로, 북왕국이 아람을 중심으로 한 반아시리아 동맹에서 탈퇴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레스터 그래비, 『고대 이스라엘 역사』 243).


    ‘여호람’ 시절 두로와 시돈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로 인해 북왕국과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예후’에 의해 ‘이세벨’이 살해당하기 전이기 때문에 북왕국과 페니키아는 동맹 관계에 있었고, 아람을 중심으로 한 12개국 동맹과 적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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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크 석비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살만에셀 3세’의 기록이 담긴 쿠르크 석비인데, ‘그래비’가 말하는 내용은 ‘살만에셀 3세’ 6년째로 주전 853년입니다. 이 당시 아람의 왕은 ‘하닷에셀’이었고, 그가 갑작스럽게 북왕국과 동맹을 끊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주전 845년 북왕국은 아람과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래비’가 말한 북왕국과 페니키아의 동맹 탈퇴가 아주 일시적인 상황에서 벌어졌을 수는 있지만, 이것으로 북왕국 ‘여호람’과 아람 ‘하사엘’의 대립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북왕국 ‘여호람’이 아람 왕 ‘하사엘’과 대립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사엘’의 왕위 찬탈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아람에 공격을 감행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8장 28-29절」은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이 본문은 아람의 ‘하사엘’이 침략해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북왕국 ‘여호람’과 남왕국 ‘아하시야’가 길르앗-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웠다고 말합니다. 


    북왕국 ‘여호람’은 아마도 아람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자 아람 침공을 단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람’의 군사 정책이 군부 지도자들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모압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지 않은 채, 아람에 대한 침공을 강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자면, ‘예후’의 반란에는 친아시리아 성향의 세력이 동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후’가 왕위에 오른 후 최대 3년 만에 북왕국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됩니다. ‘예후’는 아시리아 ‘살만에셀 3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정중호’는 ‘예후’의 반란 시기를 주전 841년으로 잡고, ‘살만에셀 3세’의 침공 때 ‘예후’가 빠르게 움직여 아시리아 세력을 등에 업고 북왕국 왕위를 인정받았다고 말합니다(정중호, 『열왕기하』, 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1, 204). 저도 개인적으로 ‘예후’의 반란 뒤에는 아시리아의 힘이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이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봅니다.


    예후 반란이 남긴 것


    ‘예후’ 반란이 ‘여호람’의 잘못된 군사 작전 때문이었다면, 반란 이후 ‘예후’ 역시 성공적인 군사 정책을 펼치진 못한 듯 합니다. 그의 친아시리아 정책, 아시리아에 속국이 되는 정책은 북왕국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정책은 반아시리아 연합을 주도하던 아람과 적대하는 길이었고, 아람 왕 ‘하사엘’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당하게 만드는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아시리아가 주전 838년 이후 시리아-팔레스타인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예후’의 예상과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정책은 ‘여로보암 2세’의 등장 전까지 북왕국 영토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와 함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인 사건은 북왕국과 페니키아의 동맹을 깨뜨리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또 ‘아합’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남왕국 ‘아하시야’까지 죽였기 때문에 남왕국과의 관계도 악화됩니다.


    ‘예후’가 이렇게 북왕국을 주변국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상황을 초래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가 「열왕기」의 진술대로 야웨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쩌면 ‘여호람’의 통치 시기 북왕국의 상황이 이런 위험을 감내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9-10장」에 나타난 반란의 상황이 실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면, 북왕국의 수많은 세력은 ‘예후’를 중심으로 뭉치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군대 장관들은 ‘예후’의 편을 들었고, 야웨 예언자들도 ‘예후’의 편에 섰습니다. 이후 ‘예후’가 바알 예언자와 제사장을 몰살했기 때문에 주류 종교 집단은 ‘예후’와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세벨’ 살해 장면에서 궁궐 내시는 ‘예후’의 편에 섭니다(왕하9:32-33). 얼마나 많은 궁중 세력이 ‘예후’의 편에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세력도 ‘예후’의 편에 섰습니다. 「열왕기하 10장 1절」에 따르면, 사마리아에 있던 이스르엘의 귀족들, 장로들과 교육하는 이들, 왕궁에 있는 이들도 ‘예후’의 편에 섰습니다.


    물론 이들은 ‘예후’의 무력이 두려워 굴복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후’ 반란에 수많은 세력이 연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예후’는 외부적으로 북왕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굳건한 체계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부적 결속이 ‘예후’의 손자 ‘요아스’ 이후 북왕국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를 증명할 근거는 없습니다만, ‘예후’ 왕조 시기 북왕국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후’ 반란의 당위성에 대해서 「열왕기」에 나타난 증거와 고고학적 사료를 통한 이야기만 드렸는데,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는 특이한 가설이 한 가지 등장합니다. ‘예후’ 반란이 일어나기 전 남북왕국을 다스렸던, 남왕국 ‘여호람’과 북왕국 ‘여호람’이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거의 동시대에 각 나라를 다스렸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남북왕국 ‘여호람’과 ‘아하시야’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 남북왕국 ‘여호람’이 동일 인물일 경우에 ‘예후’ 반란의 대의명분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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