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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⑹] 정의와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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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323)입니다. 그는 정의의 본질이 평등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일반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했습니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가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가치로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공정성(fairness)을 구현하면, 평화로운 공동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공정성이란 사회적으로 이미 규정된 차이, 곧 출생 성분, 소유 재산, 개인의 역량과 관련한 차이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정의란 질서유지입니다. ‘status quo’, 현상유지이지요. 이런 정의는 안정성을 유지시켜 주는 규범과 제재를 낳습니다. 따라서 정의는 응보적 정의, 곧 사회 안전과 통합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배분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에 관심합니다. 다시 말해, 공정한 배분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긍휼’과 권리의 회복이 정의라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함’(raham)이 같은 낱말인 ‘자궁’(태)로 변용되고(이 49,15), 그래서 ‘긍휼’은 ‘자궁 같은 모성애’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들은 ‘정의와 공의’(justice and righteousness)를 짝으로 묶어 사용함으로써, 공평한 배분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회복적 정의’를 ‘공의’ 개념으로 포함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 없는 정의의 무자비함’과 ‘정의 없는 사랑의 무력함’을 극복한 것입니다.


    < 2 >


    하나님의 자비는 정의와 공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른바 ‘포도원 주인과 날품팔이들’의 비유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종일 일한 품꾼들과 저녁 늦게 와서 겨우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들에게 똑같이 하루의 품삯,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 이야기이지요.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은 은근히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자, 주인에게 항의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관심은 모든 품꾼들의 기본적 생존권의 보장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공쳤다는 허탈함과 좌절감을 안고 종일 염려하며 기다리는 아내와 배고픈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품꾼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어,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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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ncent van Gogh, 「History of the Red Vineyard」(1888) ⓒWikipedia


    < 3 >


    최근 우리사회에서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의 여파로 어려워진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급한 긴급재난지원비를 둘러싼 논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국민 모두에게 지급해야 한다, 아니다,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다툼이지요.


    며칠 전, 머리를 깎으러 간 미용실에서 들은 대화, 왜 ‘일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느냐, 국민 모두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흥분하면서, ‘빨갱이 정부라 그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누리는 보편적 복지는 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가는 것은 복지의 과잉이라면서, 종북 좌파정부라 그런다는 것입니다.


    긴급재난구호가 왜 색깔과 관계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노동 강도와 노동력을 고려하지 않고 꼭 같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마태의 이 비유에 나오는 하늘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이고, 하나님은 빨갱이 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질문으로 끝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로 새번역은 번역했으나, 헬라어 원문은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악하오?’입니다. 이 질문은 포도원 주인의 질문이자, 동시에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남긴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서도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못마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이지요. 하나님의 선이 당신들의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경쟁과 차별의 구조 위에 세워진 경제 질서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을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것인지, 자기 자신의 ‘악한 눈’으로 볼 것인지 청중들에게 선택하게 하신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 4 >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적 대타협은 평등한 배분적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처럼,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시 82,3). 왜냐하면,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이 42,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 1,29)고 말합니다. 교회는 믿는 특권은 누리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동일시하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고난 받는 특권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사회적 대타협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누려온 믿는 특권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특권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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