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코로나19로 조모와 아버지 잃은 한인 남매의 꿋꿋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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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천 헤럴드|
작성일2020-07-02 |
조회조회수 : 5,6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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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철직 목사의 남겨진 자녀들, 주류에서도 관심
NBC, CBS 등 주류언론 안타까운 소식 잇따라 전해
김한나 씨 KYCC Gen By Gen project에 일기 남겨.
김한나 씨가 NBC와의 인터뷰에서 심경을 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아버지 고 김철직 목사와 외할머니를 잃고 어머니 김은주 사모까지 위독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던 김한나(22) 씨와 조셉 김(17) 남매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22일 본보에서 미주 처음 단독으로 보도된 후(www.cheraldus.com/archives/13408) 한인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들 남매의 소식은 16일 주류 방송인 NBC와 CBS등에서 잇따라 보도됐다. 남매를 돕기 위한 고펀드미 닷컴(www.gofundme.com/f/the-hannah-and-joseph-kim-family-fund)에는 목표액 35만 달러를 넘는 40만 4000여 달러(6월 17일 현재)가 모금됐다.
단란했던 이들 가정에 코로나19의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16일. 요양원에서 지내던 외할머니를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김은주 사모가 집으로 모시고 오면서 시작됐다. 치매 때문에 거동조차 불편한 외할머니를 김 목사 가족들은 정성으로 돌봤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이미 코로나19에 감염된 상태였다.
요양원측에서는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언조차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먼저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얼마 후 목숨을 잃었다. 그후 코로나19에 감염됐다는 판정에 내려졌다. 가족 모두 양성반응 나왔다.
얼마 후 김철직 목사와 김은주 사모까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지난 5월 21일 결국 숨을 거뒀다. 김 사모는 아직 병원에 입원 중이다. 코로나19에서는 벗어났지만 폐 손상이 심해 이식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매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펀드미 닷컴 화면
김한나 씨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설명했다. “엄마는 지금 기계 없이 숨을 쉴 수 없는 상태다. 주위 사람들과 커뮤니티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현재 김한나 씨와 조셉 김 군은 단 둘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상황이어서 외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버지 김철직 목사가 숨을 거둔 직후엔 출석하던 미주평안교회와 김 목사가 소속되어 활동하던 예장 합동측 선교사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문 앞에 두고 가면 이를 받아쓰던 상황이었다.
김한나 씨는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에서 세대간 소통을 위해 진행하는 젠 바이 젠 프로젝트(Gen By Gen project) 사이트에 일기체의 글을 남겼다.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날짜별로 솔직하게 표현해 코로나19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다음은 KYCC 젠 바이 젠 프로젝트에 소개된 김한나 씨의 글이다. 영어로 된 글을 한글 표현에 맞게 의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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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할머니가 어제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 할머니가 도착하기 전 낡은 의료용 침대가 먼저 거실에 설치됐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 임시 거처를 거실에 두었다.
지난 주 대부분의 요양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을 집으로 모시고 가야한다는 방송이 이어졌다. 소식을 들은 엄마가 5년 넘게 요양원에 머물던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할머니가 오시면서 가족의 삶이 바뀌었다. 치매로 걸을 수조차 없던 할머니는 혼자서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다. 엄마와 내가 항상 옆에 있어야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아빠가 운영했던 작은 한의원도 문을 닫았다. 70세가 다되어 가는 아빠가 힘겹게 운영하던 곳이지만 점차 버거워 졌다. 환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의원 문을 닫았지만 비용은 계속 나가야 했다.
돈을 지급해야 할 고지서들이 쌓여갔다. 거기다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세운다는 소식이 나돌고 있었다. 대기업들의 이기심이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5월 11일
글을 쓸 때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얼마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지난번 글을 쓴 후로 많이 바뀌었다. 할머니는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빠랑 엄마도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코로나19 확진판정을 받았다.
할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왔을 때 할머니는 아무 증상이 없었다. 할머니가 오시고 난 후부터 아버지는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면서 평상시보다 일찍 방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아파트에 단 둘이 남게된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한나 씨(왼쪽)과 조셉 김 군의 최근 모습. KYCC Gen By Gen project 자료제공.
며칠이 지났다. 내 생일이었다. 그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4월 27일 우리 가족은 매우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야겠다고 결정졌다. 엄마는 어쩌면 다시 할머니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 집에 계시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당시 할머니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99~101도나 되는 열이 계속됐다. 일주일 이상 열이 났다. 911에 전화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그리고 많은 약을 투여 받았다.
“왜 좀 더 일찍 911에 전화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됐다. 그리고 “요양원에선 왜 할머니가 코로나19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정말 궁금했다. 결국 우리 식구들 모두는 코로나19에 감염됐다.
할머니가 병원에 가신 후 아빠는 스스로 911에 전화해 도움을 구해야만 했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난 새벽 6시쯤 되었을 때에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밤새 울고 지친 상태였다. 간신히 눈을 감았을 때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점점 다가왔다. 소리가 가까울수록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빠 방으로 뛰어갔다. 아빠는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 공황에 빠진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렇게 두려웠던 악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리는 아빠의 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난 마스크를 쓴 채 아빠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꺼야”하고 신호를 보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앰뷸런스의 문이 닫혀 지고 점점 멀어져 갔다.
같은 날 엄마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겁이 났다. 부랴부랴 엄마와 응급실로 달려갔다. 거의 5시간 정도를 차가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구토와 기침이 계속됐다. 간혹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다음 날 또 병원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4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간신히 자리가 나 입원했다.
코로나19 증상으로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에 김은주 사모(왼쪽)는 두번째 병원에 가서야 입원을 할 수 있었다. NBC 뉴스 화면 캡쳐.
아빠와 엄마가 모두 병원에 입원한 지 2주도 안 됐지만 한 달처럼 느껴진다.
나와 남동생 둘만 집에 남겨졌다. 병원에 있는 아빠와 엄마가 걱정돼 불안한 마음이 이어졌다. 거기에 쌓여가는 청구서들을 어떻게 지불해야 할지도 걱정됐다.
지난 몇 주 동안 좌절과 불안의 뒤엉킨 나날이었다. 두려움이 떠나질 않았다. 병원과 친구, 친척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계속해서 받아야 했다. 사랑과 걱정의 전화지만 점점 지쳐가고 있다. 아빠, 엄마가 입원한 병원의 병실 전화번호까지 다 외웠다.
다음날이 되면 병원이 어떤 소식을 전해올지 두렵게 느껴졌다. 두렵고 겁났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할머니는 진정제를 맞고 있는 동안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화장해 뉴욕에 있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모시기로 했었다.
지금 엄마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엄마는 병실에 혼자 계신다. 아빠와 달리 의식이 있는 상태다. 병실에서 혼자 고립된 채 슬퍼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기 때문에 통화를 할 때마다 짧은 대화만 이어졌다. 엄마는 오늘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중환자실에서는 통화가 안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전화기를 늘 옆에 두고 있다.
아빠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 할머니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 있는 건 정말 끔찍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힘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5월 29일
(5월 22일 김철직 목사도 목숨을 잃었다.) 아빠의 죽음은 남은 우리를 정말 큰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동생과 나는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했다. 지금 아빠는 훨씬 더 좋은 곳에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 사는 방식, 일하는 방식,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을 바꾼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에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있다.
서로 책임담당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있다. 동생과 더욱 가까워졌다. 비록 지난 몇 주간 삶이 정말 파괴적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공동체에 대해 너무 많이 배우고 있다.
한국의 한 감염병 관계자는 코로나19는 매우 잔인한 병이라고 지적했다.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파돼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했다. 고 김철직 목사(왼쪽 끝)의 가족사진. KYCC Gen By Gen project 자료제공.
크리스천 헤럴드
할머니가 어제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 할머니가 도착하기 전 낡은 의료용 침대가 먼저 거실에 설치됐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 임시 거처를 거실에 두었다.
지난 주 대부분의 요양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을 집으로 모시고 가야한다는 방송이 이어졌다. 소식을 들은 엄마가 5년 넘게 요양원에 머물던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할머니가 오시면서 가족의 삶이 바뀌었다. 치매로 걸을 수조차 없던 할머니는 혼자서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다. 엄마와 내가 항상 옆에 있어야 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아빠가 운영했던 작은 한의원도 문을 닫았다. 70세가 다되어 가는 아빠가 힘겹게 운영하던 곳이지만 점차 버거워 졌다. 환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의원 문을 닫았지만 비용은 계속 나가야 했다.
돈을 지급해야 할 고지서들이 쌓여갔다. 거기다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세운다는 소식이 나돌고 있었다. 대기업들의 이기심이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5월 11일
글을 쓸 때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얼마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지난번 글을 쓴 후로 많이 바뀌었다. 할머니는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빠랑 엄마도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코로나19 확진판정을 받았다.
할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왔을 때 할머니는 아무 증상이 없었다. 할머니가 오시고 난 후부터 아버지는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면서 평상시보다 일찍 방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아파트에 단 둘이 남게된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한나 씨(왼쪽)과 조셉 김 군의 최근 모습. KYCC Gen By Gen project 자료제공.
며칠이 지났다. 내 생일이었다. 그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4월 27일 우리 가족은 매우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야겠다고 결정졌다. 엄마는 어쩌면 다시 할머니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 집에 계시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당시 할머니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99~101도나 되는 열이 계속됐다. 일주일 이상 열이 났다. 911에 전화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그리고 많은 약을 투여 받았다.
“왜 좀 더 일찍 911에 전화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됐다. 그리고 “요양원에선 왜 할머니가 코로나19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정말 궁금했다. 결국 우리 식구들 모두는 코로나19에 감염됐다.
할머니가 병원에 가신 후 아빠는 스스로 911에 전화해 도움을 구해야만 했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난 새벽 6시쯤 되었을 때에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밤새 울고 지친 상태였다. 간신히 눈을 감았을 때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점점 다가왔다. 소리가 가까울수록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빠 방으로 뛰어갔다. 아빠는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 공황에 빠진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렇게 두려웠던 악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리는 아빠의 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난 마스크를 쓴 채 아빠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꺼야”하고 신호를 보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앰뷸런스의 문이 닫혀 지고 점점 멀어져 갔다.
같은 날 엄마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겁이 났다. 부랴부랴 엄마와 응급실로 달려갔다. 거의 5시간 정도를 차가운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자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구토와 기침이 계속됐다. 간혹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 다음 날 또 병원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4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간신히 자리가 나 입원했다.
코로나19 증상으로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에 김은주 사모(왼쪽)는 두번째 병원에 가서야 입원을 할 수 있었다. NBC 뉴스 화면 캡쳐.
아빠와 엄마가 모두 병원에 입원한 지 2주도 안 됐지만 한 달처럼 느껴진다.
나와 남동생 둘만 집에 남겨졌다. 병원에 있는 아빠와 엄마가 걱정돼 불안한 마음이 이어졌다. 거기에 쌓여가는 청구서들을 어떻게 지불해야 할지도 걱정됐다.
지난 몇 주 동안 좌절과 불안의 뒤엉킨 나날이었다. 두려움이 떠나질 않았다. 병원과 친구, 친척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계속해서 받아야 했다. 사랑과 걱정의 전화지만 점점 지쳐가고 있다. 아빠, 엄마가 입원한 병원의 병실 전화번호까지 다 외웠다.
다음날이 되면 병원이 어떤 소식을 전해올지 두렵게 느껴졌다. 두렵고 겁났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할머니는 진정제를 맞고 있는 동안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화장해 뉴욕에 있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모시기로 했었다.
지금 엄마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엄마는 병실에 혼자 계신다. 아빠와 달리 의식이 있는 상태다. 병실에서 혼자 고립된 채 슬퍼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기 때문에 통화를 할 때마다 짧은 대화만 이어졌다. 엄마는 오늘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중환자실에서는 통화가 안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전화기를 늘 옆에 두고 있다.
아빠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 할머니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에 있는 건 정말 끔찍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힘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5월 29일
(5월 22일 김철직 목사도 목숨을 잃었다.) 아빠의 죽음은 남은 우리를 정말 큰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동생과 나는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했다. 지금 아빠는 훨씬 더 좋은 곳에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 사는 방식, 일하는 방식,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을 바꾼다. 동생과 나는 엄마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에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있다.
서로 책임담당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있다. 동생과 더욱 가까워졌다. 비록 지난 몇 주간 삶이 정말 파괴적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공동체에 대해 너무 많이 배우고 있다.
한국의 한 감염병 관계자는 코로나19는 매우 잔인한 병이라고 지적했다. 자신도 모르는 상황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파돼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했다. 고 김철직 목사(왼쪽 끝)의 가족사진. KYCC Gen By Gen project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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