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 워싱턴 주, 선교사 마커스 휘트먼 동상 제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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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휘트먼의 기념비가 미 국회 의사당에서 뽑히고 있는데, 일부 학생들은 그의 이름을 가진 두 번째 동상을 자신의 대학에서 제거하기를 원한다. (사진: Tom Skeen / AP를 통한 Walla Walla Union-Bulletin)
마커스 휘트먼(Marcus Whitman)의 동상이 워싱턴 주 왈라 월라에 있는 휘트먼 칼리지 캠퍼스 바로 외곽에 세워져 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마커스 휘트먼은 1847년 워싱턴 주 왈라 왈라(Walla Walla) 근처의 케이우스(Cayuse) 부족에 의해 살해된 13명 중 한 명인 존경받는 개신교 선교사로 초기 태평양 북서부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해 휘트먼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가 있었으며, 그의 행동은 제국주의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워싱턴 주의회는 미 국회의사당에서 그의 동상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왈라 왈라에 있는 휘트먼 칼리지 학생들은 최근 휘트먼 동상도 캠퍼스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최근 새로 나온 책은 영국 통치로부터 북서부를 구하려는 휘트먼의 노력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은 작년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이후 미국 원주민을 학대한 역사적 인물 동상이나 기념판, 그리고 남부 동맹 기념비를 없애려는 전국적인 운동의 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식민지 개척자의 동상은 여러 주에서 표적이 되었다.
마커스 휘트먼은 1836년에 당시 알래스카 크기인 오리건에서 소규모 선교사 그룹을 이끌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왈라 왈라 강 근처 와일랏푸(Waiilatpu)에 휘트먼 선교회를 설립했다. 이 미션은 백인 정착민을 경계하는 케이우스 부족의 영토 안에 있었다.
휘트먼과 그의 아내 나르시사(Narcissa)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부족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까다로운 기독교적 가치를 요구하는 설교했다. 저자이자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던 블레인 하든(Blaine Harden)은 학살에 대해 새로 출판한 "선교회 살인 사건"(Murder at the Mission)에서 "10년이 넘는 노력 끝에 그들은 단 두 명의 원주민만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하든은 AP 통신에 “휘트먼은 평범한 선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회는 1843년부터 1847년까지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 전도사역이 펼쳐지는 중요한 정거장이 되었다. 케이우스 부족은 선교회가 단순히 선교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백인 정착민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몇 년 후 휘트먼은 케이우스족에 대한 관심을 잃고 백인 정착민을 개종시키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휘트먼은 결국 아메리카 원주민이 정착민에게 정착지를 양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847년 홍역 발생으로 지역 케이우스의 절반이 사망했다. 병은 선교지에서도 발생했지만 더 많은 백인 정착민이 살아남았다. 케이우스족 중 일부는 휘트먼과 그의 아내에 의한 황폐화를 비난했다. 그들은 실패한 의사를 죽이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사인 휘트먼은 그 지역을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다. 케이우스족은 선교회를 공격하고 휘트먼 부부와 다른 11명을 죽였다.
학살 이후 이 지역의 정착민들은 워싱턴 DC에 대표단을 파견했고, 이 학살을 통해 미 의회가 오리건을 미국 주의 일부로 만들고 대륙 국가를 완성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고 하든은 말했다. 그 전에는 오리건 주, 워싱턴 주, 아이다호 주는 영국과 공동으로 관할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휘트먼의 살해는 왈라 왈라를 미국의 일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학살이 있은 지 20년 후, 동료 선교사인 헨리 스펄딩은 휘트먼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스펄딩은 휘트먼이 워싱턴 DC로 여행했고 “미국에서 오리건 영토를 훔치려는 영국의 음모를 막으라고 존 타일러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하든은 휘트먼이 실제로 이것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펄딩은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홍보했고, 그것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신화가 되었다고 하든은 말했는데, 그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역사책에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신화는 1900년 예일대 교수에 의해 폭로되어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휘트먼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학교, 거리, 왈라 왈라의 호텔, 워싱턴 동부의 카운티, 오리건의 국유림, 레이니어 산의 빙하 등 태평양 북서부의 랜드마크를 장식하고 있다.
1953년에 휘트먼의 영웅적인 동상이 워싱턴 DC의 연방 조각상들의 전당(Statuary Hall)에 워싱턴 주를 대표하는 두 개 중 하나로 배치되었다. 그는 사슴 가죽옷을 입고 두꺼운 성경과 안장 가방(saddlebags)을 들고 서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때도 휘트먼의 업적에 대한 거짓 이야기에 대해 불평했다고 하든은 말했다.
하든은 휘트먼 칼리지가 휘트먼 신화와 거리를 두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는 동상 홀에 있는 것과 동일한 조각상을 캠퍼스의 먼 구석으로 옮기는 것도 포함된다. 작년에 이 동상을 왈라 왈라 항구 박물관으로 옮기자는 제안도 있었다.
휘트먼 칼리지의 맥시 뮤지엄 디렉터인 리비 밀러(Libby Miller)는 이 조각상이 학교의 이름을 딴 것보다 "프론티어 신화"의 상징처럼 보인다고 현지 뉴스에 전했다.
2016년 대학은 인근 산맥을 기념하기 위해 마스코트를 “선교사들”에서 “산맥들”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엘리트 대학의 이름을 변경할 계획은 없다.
워싱턴 주 의원들은 연방 조각상들의 전당에 있는 휘트먼 동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해 왔다. 올해 그들은 사망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환경 운동가인 빌리 프랭크(Billy Frank Jr.)를 영예로운 인물로 선택했다.
이 법안의 주요 후원자인 민주당 하원의원 데브라 레카노프(Debra Lekanoff)는 워싱턴 주의회에서 유일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다. 그녀의 전략은 선교사 지지자들의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휘트먼을 비난하지 않고 프랭크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4월 제이 인즐리(Jay Inslee) 주지사는 미 국회의사당에 프랭크의 동상을 배치하는 과정을 시작하면서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법안 서명식에서 "우리는 워싱턴 주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보낸다. 미 국회의사당에 기념비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니스퀄리 강(Nisqually River)이나 레이니어 산(Mount Rainier)은 보낼 수 없지만 빌리 프랭크는 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휘트먼 학생들은 4월 시위를 포함하여 캠퍼스에서 휘트먼 동상을 제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2학년인 질리언 브라운(Gillian Brown)은 휘트먼의 유산을 영화롭게 만드는 그의 동상이 불편하다고 학교 신문에 말했다.
“처음 휘트먼에 와서 우리를 기념비로 데려갔을 때도 나는 '이 사람은 식민지 개척자이다. 그는 축하받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브라운은 말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캠퍼스 동상은 왈라 왈리 시의 소유라고 대학 대변인은 말했다. 시는 주민들이 공공 예술품 제거에 대한 공식적인 요청을 제출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