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USA.org 재미한인기독선교재단
로그인이 안되세요?  ID PW
Main Contents
설교 KCM방송 칼럼 뉴스 교회 카페 찬양 목회 선교 게시판 도서
현재위치 : Home >> 목회 >> 설교자료 >> 설교원문 2017년 10월 22일 23:11 (LA 기준)
설교자료



아카데미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인쇄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2015.09.11 조회 : 2786
발디엘’이라는 사람

 

오늘은 사무엘서에 나오는 소소한 얘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우연히 사울 왕에게 발탁되어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가 출세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양쪽 군대가 서로 마주보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블레셋 측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나와서 1대1로 맞서보자고 이스라엘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 군대만 자극한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모욕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그가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때 어린 다윗은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러 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걸 우연히 봤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그와 대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엔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골리앗이 싸울 준비도 하기 전에 다윗은 전광석화 같이 무릿돌로 돌멩이를 던져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 후로 다윗에게는 출셋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사울의 고위 지휘관이 됐고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사울 왕의 인기를 능가하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사람은 수천 명이지만 다윗이 죽은 사람은 수만 명이다.”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시기질투하게 됐습니다. 그는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게다가 야훼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다는 얘기를 사무엘에게 들은 다음에는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다윗을 이유 없이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꾀를 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인들을 죽여서 양피 1백 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지요. 이에 다윗은 군인들을 이끌고 가서 양피를 1백 개도 아니고 2백 개나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혹 떼려다 혹 붙인 셈인데 약속을 안 지킬 수는 없었으므로 둘째딸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마침 그녀도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으니 겉으로 보기엔 잘된 결혼처럼 보였을 겁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구약성서에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첫 사람은 미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갈등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사위가 됐지만 사울이 여전히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후로 다윗은 몇 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해야 했고 심지어 원수 블레셋의 용병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야인(野人)생활을 한 겁니다. 그 사이에 사울은 혼자가 된 미갈을 발디엘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우리는 발디엘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가 등장하는 곳은 오늘 읽은 사무엘하 3장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34장에 같은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는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고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됐습니다.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좌에 앉혔지만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실권은 아브넬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째로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다윗은 조건을 하나 내걸었지요. 한때 자기 아내였던 미갈을 데려오라는 게 그것입니다. 아브넬은 그러겠다고 하고 미갈을 데리러 발디엘의 집으로 갔습니다. 

 

발디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겠습니까. 자기들 맘대로 결혼시켰다가 자기들 맘대로 이혼시키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아브넬이 누구라고 그가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아브넬은 발디엘의 집에 가서 미갈을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 3장에 그 얘기가 전해집니다. 이때 발디엘은 울면서 바후림까지 미갈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아브넬이 그에게 “당신은 그만 돌아가시오.” 하고 말하니까 그제야 돌아갔다는 겁니다.

 

저는 이 발디엘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가 미갈과 결혼한 것도 그의 의지에 따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사는 동안 사랑이 싹트고 자랐나 봅니다. 그래서 그녀와 헤어질 때는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와 헤어지지 못하고 오랫동안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겠지요. 한편 앞서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는데 다윗도 미갈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성서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발디엘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말은 없지만 그는 자기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울면서 그녀를 따라갔던 게 그것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이미 죽었으니 그에게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궁금한 점은, 미갈과 헤어진 후 발디엘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미갈과 결혼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녀와 헤어진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사무엘하 3장이 전하는 쓸쓸한 결말을 갖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온통 우울한 세상

 

발데일은 미갈과 강제로 헤어진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 일이 벌어진 후 그의 삶은 ‘우울증’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과 강제로 헤어진 다음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가 그 심정을 헤아려줬겠습니까? 타의로 결혼했다가 타의로 이혼당한 심정을 그 누가 알아주고 위로해줬겠나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울증을 앓았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우울증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말도 듣습니다. 최근 자살하는 사람들 이유를 보면 경제적 이유와 우울증, 두 가지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우울증에는 환경 때문에 겪는 우울증과 병적인 우울증으로 나눌 수 있는데 환경에서 오는 우울증은 증세가 심해도 대개는 환경이 바뀌면 나아진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병적인 우울증은 더 심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울한 마음의 상태나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의 감정이 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상태로 이런 사람이 겪는 고통은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식욕도 없어지고 잠도 못 자며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고 하는데 이게 무척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이런 상태가 밤낮 없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계속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잠시 우울해지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그런 상태가 몇 년이고 계속된다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이게 우울증 환자가 겪는 현실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큰 오해는 의지가 약하거나 신앙이 부족해서 걸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우울증을 신앙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암이나 심장병이 신앙과 무관하게 생기듯이 우울증 역시 신앙과 무관하게 걸리는 질병입니다. 얼마 전에 한 유명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목사가 자살을 할 수 있나?’ 라며 수군거렸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알려지니까 사람들은 ‘목사가 무슨 우울증에 걸려? 목회를 제대로 안 했나 보군. 목사가 우울할 여유기 어디 있다고......’라며 비난하더랍니다. 목사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 안 걸리는 종류의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목회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질병입니다.

 

우울증은 스트레스를 방어하고 흡수하는 신체의 기제가 고장이 나서 생기는 질병입니다.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니고 죄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울증 앓는 사람에게 손가락질 하면 안 됩니다. 수군거리면 안 됩니다. 괴로운 일이 있어도 마음 가볍게 먹고 훌훌 털어버리면 된다고 쉽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게 안 되니까 병에 걸린 것인데 훌훌 털어버리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우울증은 환자 자신이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해야 합니다. 다행히 요즘은 부작용이 적은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상당한 정도까지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도가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만 거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의 친지가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환자 자신에게 기도하라고 강요하거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하는 것은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지의 무관하게 미갈의 남편이 됐다가 또 타의에 의해서 미갈을 빼앗긴 발디엘 얘기를 하다가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우울증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우울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난주에는 익사한 세 살짜리 시리아 아이 시신이 온 세계를 슬픔과 분노에 빠뜨렸습니다. 그 사진을 본 후로 저는 계속 우울합니다. 어제는 <무한도전> 우토로 마을 편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게 언젠데 징용으로 끌려간 분들 후손이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걸 보고 급속히 우울해졌을 뿐 아니라 화도 많이 났습니다. 

 

관심 갖고 같이 있어주는 게 고통 극복의 길

 

슬픔은 곧 고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합니다.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원하는 것이 사람들의 바램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날만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비가 오는 날도 있고 천둥벼락 치는 날도 있게 마련입니다.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올 때 그걸 피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경우엔 비를 맞아야 합니다. 비를 맞되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정작 고통이 왔을 때 충격을 덜 받을 수는 있지만 준비했다고 고통이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 넋 놓고 있다가 고통과 맞부딪치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고통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신앙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고통 없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이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줄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 그저 고통을 잘 겪을 수 있게 해줍니다.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문제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을 찾아서 그걸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난민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난민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은 전쟁입니다. 대부분의 난민은 전쟁 때문에 생겼습니다. 전쟁의 산물인 겁니다. 벌써 5년째 지속되는 시리아 내전이나 이라크 전쟁, 유고 내전 등 때문에 난민이 생겼으니 그 전쟁들을 막아야 난민을 없앨 수 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더 이상 난민을 만들지 않으려면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는 말은 고통당하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게 하는 조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모든 전쟁을 중단한다고 해도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난민들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당장 전쟁을 그친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고통당한다는 말입니다. 전쟁에서의 처절한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정전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없어지겠습니까. 세상 모든 전쟁을 멈춘다고 해도 이미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을 돕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You are NOT alone!”을 우리가 몸으로,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만이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에 관련해서 정치경제적 억압이나 불의나 불평등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 문화적 소외 못지않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무관심은 억압이나 불의 못지않게 사람을 고통에 빠뜨립니다. 억압의 족쇄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불의를 타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무관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겁니다. 

 

저는 무관심을 극복하는 데 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몇 주일 전에 신앙을 남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외롭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디엘 같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 사람은, 그를 우울증에 빠뜨린 사람은 그가 어떤 성공을 거두었든지 상관없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스보셋이 됐든 아브넬이 됐든 다윗이 됐든 그들은 공모해서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빼앗아 갔고 그로 인해 그를 외로움에 빠뜨렸습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렇게 막 대해도 됩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신앙은 왕이 되고 나라를 다스리고 성전을 짓고 야훼의 이름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누군가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곽건용 목사
KCMUSA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세요
2017-10-22
11:11:06 PM
리플달기

  목록보기 |
재미한인기독선교재단 www.kcmusa.org 설교 | KCM방송 | 칼럼 | 뉴스 | 교회 | 카페 | 찬양 | 목회 | 선교 | 게시판
재단소개 | 서비스센터 | 교회/기관등록 | 문의하기 | 웹사이트제작 서비스 | Privacy Policy
KCMUSA, 2975 Wilshire Blvd. #670, Los Angeles, CA 90010
Tel. 213.365.9188 | Fax. 213.365.9132
Copyright ⓒ 2003-2017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