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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연구15 인쇄
박익수 교수 2004.05.06 조회 : 8615
세 번째 수난 예고 (10: 32-34)

① 본문 읽기

32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놀랐으며,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기 시작하였다.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34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② 본문 해석

세 번째 반복되는 이 수난 예고 본문은 8:31과 9:31보다는 더 상세하게 수난을 예고하고,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도 분명합니다. 수난의 내용은 앞의 두 예고와 비슷해서 여기에서도 사람의 아들, 죽임, 사흘 후의 부활, 사람에게 넘겨짐 등이 똑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이 수난 예고에서 중요시되는 점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가운데 수난 예고가 주어지는 점,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직에 관한 강조점, 제자들의 무지와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앞장서서 가심으로써" 자신의 이번 여행이 수난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그 길을 앞서 가시는 것입니다.
이 수난예고는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동행하지만, 아직도 스승의 운명과 자신들의 역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목하는 제자들을 다시 한번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운명의 시간, 곧 그들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1) 예수께서 특별히 제자들을 따로 곁에 불러 놓으시고 자신의 운명을 알려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의 첫 번째 반응은 놀람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의 단호하고 결연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들도 이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왜 예수께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는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서 그의 사역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난과 죽음의 운명을 그들에게 미리 말해두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어려움을 감내하기 위해서도 예수께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 지를 분명히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행선지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말씀으로 수난 예고를 시작하십니다. 동사 "올라가고 있다"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쓰여짐으로써 예수 일행의 이번 여행은 타의에 의해서나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자발적인 것임이 강조됩니다.
바로 이 점이 세 번째 수난 예수가 앞서의 수난 예고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능동적인 태도로 이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길에 대해서 세세하게 예견 하시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운명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수난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예수의 운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 길은 "우리" 즉 예수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동행하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붙들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넘어갈 것이다"는 미래 수동태의 동사로 사용됩니다. 즉 넘겨지는 일의 배후에는 예수의 운명을 좌우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넘기운 그들의 행동은 마땅히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는 유대의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의견을 모을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마침내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줄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사형판결은 이방인의 법정, 즉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 의해 내려질 것이고, 결국은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하며 치욕스런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날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향한 제자들의 다툼(10:35-45)

① 본문 읽기

3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3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 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② 본문 해석

본문의 구성은 "제자들의 높은 자리다툼"(35-40절)과 "이 사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41-45)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보도를 통해서 제자들의 무지와 세상적인 욕망을 다시 한번 폭로하고 있습니다. 수난의 길을 향해 결연히 가시는 예수와 그의 등뒤에서 이 세상에서의 보상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제자들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는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마가복음서 저자의 의도는 분명한 것인데,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여행 목적을 모르고 있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2) 예루살렘에서 높은 자리를 요구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37절)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어떤 의미로 이해한 것 같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온당하지 못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문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 중에" 오른쪽과 왼쪽의 높은 자리를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여기서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란 유대적인 개념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메시야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메시야로서 왕국을 세울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자리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가장 높은 지위는 왕의 오른편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왼편 자리였습니다. 이들은 예수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속적인 출세의 야심 때문에 자리를 구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을 때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자기 아버지의 영광이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8:38), 즉 부활이후의 때임을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질문3)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38절의 "나의 마시는 잔"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영광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아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시면서 이들에게 자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잔'이 상징하는 것은 좋은 의미이건 나쁜 의미이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곧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고난"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예언에 근거해 볼 때(사51:17 ; 시75:8),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맞이하신 것이 분명해집니다. 예수께서는 '잔'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셔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뿐 아니라, 세상의 죄, 혹은 악한 사람 대신에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도 이해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세례"는 교회 성례전의 그 세례 의식이 아니라 "홍수로 침몰되어" 물속에 빠지는 재앙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시42:7 ; 124:4).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잔'과 '세례'로 표현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어보신 것은 너희도 나의 고난과 죽음을 겪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4) 예수의 질문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받는 세례'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다'고 성급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재 심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그들도 언젠가는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야고보는 후에 순교를 당함으로 고난에 참여하게 됩니다(행12: 2).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 즉 너희도 나의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말씀은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좌우 편에 누구를 앉게 하는 것이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보상에 따른 권한은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완곡하게 나타내신 것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이유가 보상에 대한 기대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한다면 보상에 연연하지 말고 주님이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에 선뜻 따라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5) 당신은 왜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야고보와 요한의 영광스런 자리 요청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침내는 열 두 제자들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분개해서 말과 행동으로 이를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분노는 두 제자가 영광의 자리를 탐할 때 나머지 제자들도 말로 표현만 못했을 뿐이지,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6)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추구하는 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의 방식이 확연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서로 다른 점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까지 보시고, 참을성 있게 이들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시려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집권자들과 신하들의 통치 행태는 자신들의 마음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관심을 두었던 영광스러운 자리를 향한 다툼도 사실은 세상 집권자들의 통치 행태를 본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이 가르침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한 원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해하고 몹시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7) 당신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교회의 지도자들도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와 같은 제자들,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는 예수의 일생을 통한 섬김의 자세와 십자가에 죽으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의 일생이 "섬기러 왔으며 대속물로 주러 왔다"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능력이나 권위를 내세워 섬김을 받으려 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또한 예수의 죽으심이 섬김의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질문8)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입니다." '대속물'의 뜻을 써 보십시오.

대속물은 문자적으로 부채로 인해서 노예가 된 사람과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몸값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본문에만 사용된 이 '대속물'이란 단어는 예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속전을 의미합니다. 인류가 갚아야 할 당연한 죄의 삯을 그가 대신해사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란 주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유익을 얻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만일 예수께서 당신에게도 "네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실 때, 당신의 솔직한 대답은 어떻습니까?

♣ 우리는 크고 작은 선거를 통해서 국가원수나 지방의 장(지도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교회 안에서 여러 과정을 거쳐 직분자들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다릅니까? 당신은 실제로 그들에게서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 우리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서로 섬기고 종이 되려는 사람이 많습니까? 교회안서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생활은 어떻게 변화해야 되겠습니까?

바디매오를 고치심 (10:46-52)

① 본문 읽기

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질문9) 바디매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이 갖고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바디매오는 시각장애자였으며 구걸로 연명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듣고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나사렛 예수"가 아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호칭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예수의 족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나타나서 민족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민족적인 열망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나타납니다(11: 9-11). 또한 유대의 전통을 보면, 솔로몬 전승 가운데 왕에 대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운 왕은 지혜와 가르치는 권위, 그리고 귀신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의 구원자로서의 운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디메오가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그를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질문10) 바디매오가 예수께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디매오는 예수께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으로 먼저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체적 문제 뿐 아니라 전인격적인 치유도 요청한 것입니다.

질문) 당신은 사람들이 왜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 사람들은 예수의 진로와 사역에 바디매오가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체적 장애나 가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의 결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바디매오에게도 같은 편견을 갖고 천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질문11) 주위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꾸짖어도 바디매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47-48절)

사람들이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강한 태도로 예수의 자비를 구함으로써 예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를 바라고 따르는 모든 사람의 태도도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위의 반대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구하는 바디매오에게 관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보시고 측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불렀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라는 말씀은 치유의 기적을 기대하도록 만듭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실에 감격해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갔습니다. 겉옷을 내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바디매오의 크게 기뻐하며 즉각 반응한 것을 잘 나타내 줍니다. 예수의 부르심에도 많은 소유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간 부자 청년의 태도와는 아주 대조되는 반응입니다.

질문12) 바디매오의 소원을 들으신 후 예수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눈을 떠라'는 명령 대신에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예수의 말씀이 치유의 동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이는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치유보다는 '믿음'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여기서 구원했다는 의미도 단순히 시력 회복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디매오는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원하신 예수께 믿음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치유는 물론이고 영적인 구원까지도 포함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서 어두움이 없어지는 이적을 체험했고, 그 이적은 이제 예수를 바로 보고 따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질문13) 바디매오는 눈을 뜨자 곧 예수를 쫓게 됩니다. 제자들과 바디매오의 태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바디매오는 눈을 뜨자 마자 곧 예수의 수난의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마음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뒤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치유기사이며,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사건입니다. 이 단락을 통해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제자직의 의미를 무척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다." 바디매오는 육체적인 시력을 회복하면서 영적인 눈도 밝아져서 즉시 '인자'이신 예수를 좇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육신의 눈을 갖고 예수와 늘 함께 있으며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 '인자'이신 주님을 볼 수도 없고, 여전히 따라 나서는 것도 머뭇거릴 뿐입니다.
마가복음서 저자가 강조한 것은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뒤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언제까지 머뭇거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의 눈을 열어 주님을 바로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나서는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바디매오의 태도와 비교해 보십시오.
 
KCM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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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2:45:0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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