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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위인* 그룬투비 인쇄
KCMUSA 2008.08.22 조회 : 19472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는 지금도 세계 곳곳의 농촌운동가들과 신학자들이 그 이름을 외치고 있는 인물이다.

1783년 9월8일 덴마크의 우드비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 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덴마크라고 하면 지금은 누구나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 부유한 나라를 떠올리지만 그룬트비가 살던 19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 의식개혁운동을 주창했다.
그 바탕은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이념이었다.

그룬트비는 또 덴마크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스칸디나비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새로운 낙농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성인기숙교육학교 설립을 주장했다. 이것이 국민고등학교다.
기숙학교는 자발적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통해 소극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갖도록 가르쳤다.

국민고등학교는 덴마크 전역으로 확산돼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고등학교를 마친 사람들의 삶을 목격한 덴마크 국민 사이에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룬트비가 내세운 ‘하나님을 사랑하자,이웃을 사랑하자,땅을 사랑하자’는 3애(三愛)정신은 곧 덴마크 국민의 구호가 됐다. 그 정신은 지금도 덴마크 사람들의 마음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 기적도 없고 요행도 없다. 오로지 노력하는 사람만이 거둘 수 있다는 자연의 진리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에게 깨우쳐준 것이다.

그룬트비는 낙농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목사들을 먼저 설득했다. 그룬트비는 목사들이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전령이 돼야 한다며 3애정신과 함께 낙농기술을 가르쳤다. 각 지역의 교회는 낙농기술을 가르치는 주민센터가 됐다.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농업운동이 확산됐다. 덴마크의 위대한 중흥이 시작됐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새마을운동의 초기 주창자들은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활용했다. 새마을운동의 의식개혁 및 품종개량 운동 등이 모두 그룬트비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도 그룬트비의 3애정신과 비슷한 구호를 내걸고 있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룬트비였지만 그의 생애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 덴마크로부터 배척받아 영국 등 유럽 각지를 떠도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룬트비는 1812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세계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당시 합리주의 경향에 기울었던 덴마크 교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룬트비는 이후 10년동안 덴마크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시골의 교회를 떠돌아다니며 찬송시를 쓰고 문학연구에 몰두했다.
1822년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구주교회에 초빙됐지만 3년 뒤 저술한 ‘교회의 대담’에서 당시의 신학이 지나친 합리주의 경향으로 신앙을 철학사상의 일종으로 취급한다고 다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기독교는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세례식과 성찬식,즉 살아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계시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교회가 루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그룬트비는 목사직을 그만둬야 했고 7년간 설교를 금지당했다.

1848년 그룬트비는 의회정치 도입을 요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코펜하겐 제11구에서 56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다시 보궐선거가 실시돼 무투표로 당선된다. 국회의원이 된 그룬트비는 국방의 의무와 신앙·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주창하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룬트비는 국회에서 “덴마크 국민은 누구나 덴마크 안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역설해 덴마크 특유의 소농제도를 확립했다.

이처럼 격동의 삶을 살았지만 그룬트비 개인은 교육과 문학에 높은 관심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북구의 신화’와 ‘세계사 편람’은 청소년들에게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서 북유럽의 역사와 언어,성서를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됐다.
그룬트비가 지은 시들은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돼 당시 ‘덴마크 교회용 찬송가’ 60% 이상이 그의 작품이기도 했다. 이들 찬송가중 많은 작품이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영국어로 번역돼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목회자이자 시인이며 교육가, 정치인이었던 그룬트비는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861년에는 감독의 직위를 받았으며 11년뒤인 1872년 9월2일 코펜하겐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오늘날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많은 나라에서는 그룬트비의 생애와 이념을 이야기하며 그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다. 그가 남긴 족적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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