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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위치 : Home >> 칼럼 >> 지니정의 법률상식 2017년 11월 19일 13:45 (LA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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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악마와의 눈싸움 1
곽건용의 구약 산책 →블로그가기
2015.10.29
15:55:03
385 정말 비정상적이고 부끄럽고 망측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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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8
15:05:08
384 터프하게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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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15:35:06
383 화해를 향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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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15:25:11
382 하나님이 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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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3
14:55:33
사람은 만물의 영장? 아니면 하찮은 먼지?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Man is the lord of the creation)라는 말을 누가 처음 했을까요? 혹시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 있습니까? 제가 어제 찾아보려고 애썼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아닌 그 누가 그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는 말인데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렀다는 게 좀 우습지 않습니까? 자기 잘났다는 얘기니까 말입니다. 천재가 ‘난 천재야.’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닌다면 설령 그가 천재가 맞더라도 우스워지는 게 아닙니까?

 

사람이란 종족(種族)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지배적인 생명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인식이 있습니다. 곧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이란 인식과 대조되는 인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뭘까요? 그 인식이 잘 표현된 데가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사람이 땅의 먼지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먼지,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하찮은 것이 먼지가 아니던가. 가장 별 볼일 없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그래서 존재감이 없는 것,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먼지’가 아닌가 말입니다. 세상에 먼지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아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먼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구약성서 창세기를 사람을 가리켜서 먼지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먼지에서 왔다는 겁니다. 사람이 먼지란 말이 아니라 먼지에서 ‘왔다’는 겁니다. 곧 사람의 근원이 먼지랍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며 뻐겨도 근원을 따져보면 하찮은 먼지에서 온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먼지로 빚어서 코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사람이 이 진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깨달음은 자기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식과 다릅니다. 지구라는 행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종족이 왜, 어떻게 해서 자신을 하찮은 먼지라고 인식하게 됐는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구약성서에 나오므로 하나님이 가르쳐줘서 알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진실의 반쪽일 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셔서 ‘아하, 그렇구나!’하고 쉽게 깨닫게 된 게 게 아닙니다. 네 개의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고르거나 단답식 시험문제에 답하는 식으로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기나긴 삶의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은 그런 기나긴 과정 끝에 나온 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먼지에서 왔다고 인식했다는 사실, 저는 이 인식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으로 인식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찮은 존재를 하찮지 않게 봐주시는 하나님

 

그런데 사람의 자신에 대한 인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깨달음의 깊이로 따져보면 자신을 만물의 영장으로 인식한 것은 낮은 차원의 깨달음이고 그보다 더 깊은 인식은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먼지에서 왔다는 깨달음인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먼지라는 것이 그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먼지라는 게 중요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찮은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하찮은 것이 사실은 하찮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반복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할 때 일어나면 필연이나 섭리로 여겨지는 법입니다. 지난 주중에 오늘 할 설교 주제를 정해놓고 틈틈이 생각을 정리하고 가다듬고 있었는데 엊그제 신문에서 인상적인 칼럼을 하나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제 눈길을 끈 부분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칼럼 필자가 한 여성운동 행사에 갔는데 그 행사 표어가 ‘먼지차별(micro aggression) 반대’였다고 합니다. ‘먼지차별’이란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현실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서 알아보기도 어렵고 그래서 대응하기도 어려운 차별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필자는 《먼지-작은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역사》라는 책을 소개하는데 거기 이런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만물의 존재 형식이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여겼는데 최근에는 그것이 바뀌어서 소우주가 대우주를 설명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설명하는 쪽으로 설명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광대한 것을 생각함으로써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났는데 이제는 반대로 미세한 것을 생각함으로써 같은 인식에 도달한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창세기 2장 7절을 떠올렸습니다. 이 구절은 먼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사람에게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영이 됐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미세한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설명의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이렇듯 먼지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사람을 하나님이 참으로 애틋하게 생각해주신다는 인식입니다. 시편 8편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사람이 대체 무엇이기에 야훼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야훼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시냐?”고 노래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사람이 도대체 뭐라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생각해주시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인 사람을 그토록 알아주고 생각해주시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드립니까? 사람도 하나님을 알아드리고 생각해드려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뭘까요?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을 아는 걸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백성은 포로가 되고 귀족은 굶주리고 평민은 갈증으로 목이 탈 것이라 했습니다(이사야 5:13). 우상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고도 말했습니다(이사야 44:19).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는 게 뭘까요? 하나님을 알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 행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미가의 선언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야훼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야훼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걸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 마음을 알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과 당신의 가슴을 열어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 만나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겁니다. 

 

예수께서 우셨다! 하나님께서 우신다!

 

여러분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성서에서 가장 짧은 절(verse)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서를  읽다보면 어떤 절은 상당히 길고 어떤 절은 매우 짧지 않습니까? 성서에서 가장 긴 장은 시편 119편입니다. 그럼 가장 짧은 절이 어딜까요? 가장 짧은 절은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절로서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서는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라고 번역하여 세 단어지만 영어로는 “Jesus wept.”로서 단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장절을 나눈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것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경우 나눈 시대도 다르고 나눈 사람도 다릅니다. 장절을 나눈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가 무슨 생각으로 현재의 모습대로 나눴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린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예수께서 우셨다.”는 단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성서 그 어디에도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을 한 절로 끊은 데는 없습니다. 물론 이게 별 의미 없이 이루어진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장절을 나눈 사람이 이 대목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깊은 묵상에 빠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께서 우셨다.”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을 마주하고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을 거란 얘기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가슴(heart)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눈물’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분은 예수님이고 구체적으로는 바로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우셨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측은한 걸 보면 참지 못하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입니다. 

 

제가 과문(寡聞)해서인지 어떤 경전이, 어떤 종교가 절대자 하나님을 ‘우는 신’ ‘눈물 흘리는 신’으로 믿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분명히 우시는 하나님이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진실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죽은 나사로를 보고 측은해서 우심으로써 그분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나님이심을 우리로 알게 해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일 겁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가슴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한 마음으로 출렁이고 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한 자락에 내 영혼이 맞닿아 그걸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을 겁니다. 어거스틴이 그랬나요,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는 아마 어떻게든 하나님의 심장을 들여다보고 이 말을 했을 겁니다. 저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십시오. 그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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