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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위치 : Home >> 칼럼 >> 지니정의 법률상식 2017년 03월 24일 10:39 (LA 기준)
칼럼블로그
번호 제 목 작성일
386 악마와의 눈싸움 1
곽건용의 구약 산책 →블로그가기
2015.10.29
15:55:03
385 정말 비정상적이고 부끄럽고 망측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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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8
15:05:08
384 터프하게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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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15:35:06
383 화해를 향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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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15:25:11
382 하나님이 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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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3
14:55:33
381 거룩하고 애달픈 짝사랑
곽건용의 구약 산책 →블로그가기
2015.07.15
14:49:22

짝사랑이란?
 
사랑이란 것이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A라는 사람을 원하는데 A는 나를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지요. 정말 그럴까요? 한편이 사랑하지만 다른 편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건가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일방적인 사랑, 곧 짝사랑일 뿐입니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닌가요? 짝사랑도 사랑입니다.
 
흔히 짝사랑에는 일곱 가지 장점이 있다고 말들 합니다. 첫째, 거절당할 염려가 없고 둘째,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며 셋째,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게 그것입니다. 넷째, 늘 가슴이 설레고 다섯째,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상대를 바꿀 수 있으며 여섯째, 절대로 버림받지 않고 일곱째, 헤어지는 것을 내가 결정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의 짝사랑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짝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종류의 짝사랑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받아주고는 싶지만 무슨 사정인지 받아줄 수 없는 경우 말입니다. 이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짝사랑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또한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긴 하는데 그 사랑의 성격이 아주 달라서 서로 다른 사랑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짝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10일에 금요일 프로그램 첫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참석자 한 분이 물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그런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냐는 겁니다. 물론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인들 이 구절을 몰라서 질문했겠습니까. 그 구절이 마음에 와닿지 않으니까 그렇게 물었겠지요.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짝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만일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이 짝사랑이라면 그건 앞에서 든 세 종류의 짝사랑 중에서 세 번째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곧 사랑의 성격이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
 
공지영이란 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몇 개밖에는 안 읽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소설입니다. 저는 그나마 소설은 안 읽었고 영화만 봤지만 말입니다.
 
이 영화는 사형수인 윤수가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유정을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입니다. 윤수는 유정의 고모 모니카 수녀를 통해 유정을 만납니다. 일주일에 세 시간,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세 시간 교도소 만남의 방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습니다. 부유하고 화려한 여자와 가난하고 불우했던 남자의 만남입니다.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다르지만 살아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삐딱하고 매몰찬 말로 서로를 밀어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로가 닮았음을 깨닫습니다. 조금씩 경계를 풀고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진짜 이야기’를 꺼내놓지요.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했다는 유정의 고백을 듣고 윤수의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이 유정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요. 또한 윤수의 불행했던 과거와 꼬여버린 운명은 유정의 마음을 울립니다. 상처로 상처를 위로하고 아픔이 아픔을 치유하고 다독거리면서 그들의 절망은 기적처럼 찬란한 행복으로 탈바꿈합니다. 이제 유정은 자살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윤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을 믿지 않던 두 사람은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하며 살아있다는 것의 기쁨을 깨닫고 서로가 서로에게 더 없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매일이 목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그들 마음을 채울 무렵, 야속하게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화 촬영 뒷얘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목사가 안 됐다면 영화감독이 됐을 거라는 ‘야무진’ 생각을 갖고 있을 정도입니다. 촬영장에서는 ‘진심’과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갔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진심이면 충분해. 표정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라든가 “여기서 우는 건 내 진심과 다른 거 같아요. 눈물 없이 가는 게 낫겠어요.” “윤수가 되어가는 전 과정이 행복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등이 그것입니다. 사형수와 자살 미수자의 이야기이고 어려운 감정 장면이 유난히 많아서 모두 지치고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들은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는 겁니다. 의외의 반응 아닙니까?
 
이런 건 어떤 사랑일까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이해주고 받아주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삶을 놓지 않고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마디게 없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사형수가 절절한 심정으로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에게 목숨을 바쳐서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짝사랑?
 
저는 이번에 호세아 11장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지독한 사랑 아닙니까? 저는 여기서 영화의 사형수가 했던 말,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은 사랑”을 봅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그를 불러내서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춤에 안아 길렀답니다. 그러니까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커플이네요. 심지어 죽을 고비에서 그를 살려주기까지 했답니다. 그러려면 자기 목숨도 걸었겠지요.
 
왜 이렇게 사랑했을까요?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사람을 이렇게 사랑했을까 말입니다. 도대체 왜? 끝내 자길 배반하고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로 걸 건데 말입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멀어져가는 사람을 왜 이렇게 목숨을 바쳐서 사랑했는가 말입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는 왜 유정이 매주 한 번 자기에게 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보기엔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부잣집 딸이고 교수이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사형수인 자길 만나러 오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짜 얘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됩니다. 유정은 자기 못지않은 깊은 상처를 갖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상처?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겁니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없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는 하나님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하신다면 그분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면서 그 상처가 생겼을 지도 모르지요. 좌우간 하나님의 영혼에도 깊은 상처가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품에 안아서 기른 애인인데,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살려줬던 연인인데 엇나가기만 하니 말입니다.
 
헤어지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버리고 싶기도 했겠지요. 사람을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고 싶었도 했을 겁니다. 혹시 그렇게 하면 돌아오지 않올까 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애인을 원망하기만 했다. 그 심정, 그 상처는 이해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을 구걸하다시피 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이것이 짝사랑이 아니면 뭐가 짝사랑이겠습니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짝사랑입니다. 신앙은 곧 사랑입니다.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분몀히 그렇습니다. 물론 머리가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려면 가슴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머리도 필요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랑은 가슴의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짝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압니다. 우리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 죽게 하신 그 절절한 사랑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는 걸 하는 게 사랑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짝사랑인 까닭은 그 사랑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사랑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금요일 모임에서 질문한 분은 그래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면 그게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 역시 짝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기를 원하시는지, 제게 뭘 원하시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저는 서로 어긋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뭔가 바라면 안 되는 줄 압니다. 뭔가를 해달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도 제게 바라는 게 분명히 있겠지만 그걸 쉽게 드러내시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너무 쉽게 하나님께 얘기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도라는 미명으로,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내게 원한다고 믿는 것을 하고 싶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것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하지요. 왜? 사랑하니까! 심지어 상대방이 내 성격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으면 성격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것은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게 나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이것은 율법도 아니고 율법의 종합도 아니며 계명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배웠지만 지금은 그게 예수님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그걸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사랑도 깊어집니다. 처음부터 깊은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은 하면서 깊어가는 것일 겝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 뭔가 기대하지 않고 하는 사랑, 상대방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봤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은 짝사랑이지만 짝사랑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 사랑은 갈기갈기 찢어진 하나님의 영혼을 잠시라도 들여다보고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

380 믿음은 복사도 표절도 아닌 새로운 창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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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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