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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 2
누가 24:13-35

 

곽건용 목사

 

모든 것이 시대의 산물

 

지난 주일에는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를 어떻게 읽어왔는가 하는 얘기를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서를 어떻게 읽어왔는가 하는 얘기와 섞어서 말씀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하는 세 번째 설교로서 그 중에서 ‘진보적 기독교인은 성서를 어떻게 읽는가?’라는 소주제의 두 번째 설교이자 마무리하는 설교가 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애기한 내용을 짧게 요약해보겠습니다. 성서 이해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은 성서가 종교개혁 시대에 사람들이 생활에서 쓰는 일상 언어로 번역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전까지 성서는 오로지 라틴어로만 읽혔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던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미사 집전하는 사제들이나 읽을 줄 알았고 일반 시민들은 읽을 줄 아는 거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틴어를 읽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성서해석의 전권을 행사했는데 루터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독일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성서를 읽게 된 겁니다. 게다가 인쇄술 덕분에 성서가 대량으로 제작, 보급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소수가 성서 해석의 권한을 독점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는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성서 해석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이었습니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의 다음 계기는 성서의 세계관이 오늘날 우리의 세계관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대의 자식입니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성서와 그걸 기록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성서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하늘에 대한 성서시대 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 생각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세계관의 차이가 무척 컸다는 사실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아는 것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만 얘기합니다.

 

그런 세계관을 기반으로 해서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도 당시 메시지를 전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양식이 시, 이야기, 설화, 신화 등입니다. 구약과 신약성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서에 주로 사용된 문학양식도 시, 이야기와 신화 등입니다. 그때도 역사를 서술했지만 그들은 역사까지도 ‘이야기’라는 그릇에 담았습니다.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식으로 역사를 쓰지 않고 그걸 ‘이야기’라는 그릇에 담았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 오늘날과는 달랐습니다. 성서의 역사를 읽을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자식입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도 시대의 산물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과 사건이 있지만 흔치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대와 불화하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거죠. 시대와 잘 어울려서 살지 못하고 불화하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인 사람의 삶이 평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칭찬듣기보다는 비난받고 욕을 먹기 쉽습니다. 성서는 어떨까요? 성서는 시대와 어울리는 책일까요,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거나 초월해서 시대와 불화하는 책일까요? 성서는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려는 책입니다. 이를 숫자로 표시하면 성서의 90%는 시대의 한계 안에 있고 10% 정도만 그 한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여기서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는 마십시오. 대부분은 한계 안에 있고 작은 부분만 초월한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성서에서 하느님 백성의 삶이 시대와 불화하고 고난으로 점철됐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사람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인류 최초의 노예들의 종교

 

구약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입니다. 노예들의 하나님이라.... 그때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종교는 예외 없이 모두 ‘지배자들의 종교’였습니다. 지배자가 믿는 종교를 평범한 사람들과 노예들이 모두 그대로 따라 믿었던 겁니다. 그게 당연했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사회 전체가 지배자의 신을 믿었던 겁니다. 그것도 지배자들이 믿었던 방식으로 말입니다. 더 정확히는 지배자들이 믿으라고 강요하는 방식으로 믿었던 겁니다.

 

야훼라는 신은 달랐습니다. 야훼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불러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서 거기서 자기를 믿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런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을 불러내서 자유인으로 만들어서 자기를 믿게 하는 신, 이런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고 히브리인들이 만든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야훼신앙도 시대의 산물이었고 그 신을 믿던 이스라엘 역시 시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야훼신앙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점점 시대에 동화되어갔습니다. 당시 모두가 믿던 종족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던 겁니다. 자기들만 위해주는 신, 자기들만 보호하고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는 신, 이게 바로 종족신입니다. 그 시대엔 모든 사람들이, 이집트건 메소포타미아건 상관없이 모두 종족신을 믿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승리한 편의 신을 믿는 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종족신의 영향을 깊이 받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선민의식’입니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는 믿음이 선민의식입니다. 이것은 종족신앙의 일부입니다. 자기들만 위해주는 신을 믿는 주변 종족들과 뭐가 다른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면서 시작한 10%에서 시대의 어울려서 살아가는 90%가 됐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때는 유다가 망하고 성전이 박살났으며 지배층 사람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음입니다. 그 시대의 일반적인 종교관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패했으니 백성들은 야훼를 버리고 바빌론의 신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왜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을 망하게 내버려뒀는지를 물었습니다. 왜 야훼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인 자기들을 버렸냐는 겁니다. 그들은 두 가지 답을 얻었습니다. 첫째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망했다는 겁니다. 군사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외교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라는 겁니다. 야훼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에 야훼에게 버림받았다는 결론에 이른 겁니다.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

 

둘째로, 그들의 신관에 새로운 의식이 생겼는데 종족신이 아니라 보편신에 대한 생각이 그겁니다. 야훼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라고 믿기 시작한 겁니다. 오랫동안 신주단지처럼 소중하게 믿어온 ‘선민의식’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됐습니다. 그것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걸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그때는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신관은 당시에 10%에 해당되는 혁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서 안에서 이 믿음이 다수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대세로 자리 잡아 가긴 했지만 말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선와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역사의 종말 등이 지배적인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대결을 벌이는 전쟁터 말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데 계셔서 웬일인지 모르지만 일정 기간 동안 이를 내버려 두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거죠. 역사의 종말에 이르면, 곧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하나님은 악한 세력을 심판해서 영원한 불구덩이에 처넣으시고 의인들은 영원한 낙원으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의인들은 그때까진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대체로 이런 역사관 속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요 역사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다르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나 역사의 종말, 하나님나라 등을 시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역사의 종말에야 이뤄지는 게 아니란 겁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역시 종말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도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이뤄진 후에 비로소 얻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전례가 없는 새로운 믿음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10%의 믿음이었던 겁니다.

 

성서는 이런 책입니다. 성서는 분명 시대의 산물로서 그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의 틀 안에서 쓰였지만 그걸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성서에는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는 것도 진보적인 기독교인이 할 일입이다.

 

진보적인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는 방법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지난 주일과 오늘 한 얘기들 중에 이미 일부 대답이 나왔습니다. 우선 성서를 ‘사람의 책’으로 읽는 게 중요합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세계관은 오늘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릅니다. 이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성서를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우리의 믿음과 삶도 크게 잘못될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 ‘머리’로 신앙생활 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왜곡하고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만 하고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말은 성서를 사람의 글로 읽어야 한다는 말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성서는 사람의 글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글은 사람이 썼지만 성서를 쓴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은 영감을 불어넣어주셔서 성서를 읽을 때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흔히 ‘하나님의 영감’ 때문에 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책이고 틀림이 없는 책이라고 믿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감은 성서를 오류로부터 보호해주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성서를 기록하고 읽을 때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주어집니다. 성서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얘기가 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얘기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들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품고 따랐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실망한 게 아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풀이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른 채하며 이들과 걸으면서 얘길 나누셨지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겁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얘길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어리석다거나 마음이 무디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런 고난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영광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고서는 구약성서의 메시야에 대한 말씀들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이들이 구약성서 말씀들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풀어주신 말씀을 그들이 처음 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얘기로만 알고 있었을 뿐, ‘사건’이 되지는 않았던 겁니다. 성서에서 글자만 읽었을 뿐이지 살아 있는 인격을 만나진 못했던 겁니다. 성서 말씀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의 얘기였거나 단순한 지식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식탁에서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게 그들에게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눈으로 읽는 것은 글자지만 가슴으로 만나는 분은 하나님/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게 성서를 제대로 읽는 겁니다. 여기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성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예수님을 가슴으로 만나려면 글자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글자를 읽지만 그걸 뛰어넘어야 하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질문과 상상력입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성서를 읽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성서를 읽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서는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한다’라거나 ‘성서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성서를 읽는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은 성서의 권위를 독점하려는 겁니다. 성서를 읽는 가장 나쁜 방법이 바로 이것, 곧 해석과 의미를 독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일에 걸쳐서 진보적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한 얘기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서를 읽는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성서를 읽는 일입니다. 독서모임에서 《신의 역사》를 다 읽으면 하반기에는 매주 금요일에 모임을 가질 겁니다. 이때 성서공부를 맘먹고 제대로 해볼 계획입니다. 그러니 교우들 모두 참석해서 좀 더 성서를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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